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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브게니 키신,  그의 음악은 인간의 내면과 시대의 상처, 그리고 삶의 본질에 대한 탐구의 결과물이다. 그는 건반을 통해 세계와 대화하며, 시를 통해 자기 자신과 성찰한다. 이 글은 키신의 성장과 삶의 궤적, 그리고 그의 연주가 우리에게 건네는 깊은 사유를 따라가며 ‘피아노 인문학’이라는 개념으로 그를 조명한다.


    1. 예프게니 키신, 그의 삶의 궤적

    (1) 유년시기, 천재 피아니스트의 탄생

     

    예브게니 키신은 1971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그의 음악적 재능은 일찍 나타났는데, 그는 다섯 살에 피아노를 시작하여 곧바로 모스크바 그네신 음악학교에 입학했고, 12살이 되던 해에는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모스크바 필하모닉과 협연하며 전 세계 음악계에 이름을 알렸다. 이 공연은 한 소년이 건반 위에서 인간의 고통과 아름다움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하나의 예술적 사건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말 없는 언어'로 이해했다. 그리고 그 언어로 세계와 대화하려 했다. 그는 기술을 갈고닦는 대신, 곡에 담긴 작곡가의 사상이나 그 시대의 정신을 해석하려고 노력하며 거장으로서의 발돋움을 계속하였다.

    그의 연주에서는 일관되게 하나의 긴장감이 흐른다. 마치 모든 음표가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그 안에는 불확실한 세계를 탐색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 

    (2) 시를 사랑한 시인

    키신의 예술 세계는 단순히 음악에만 국한되지 않았는데, 그는 시를 사랑했고, 시를 썼다. 실제로 그는 2007년 이스라엘 시민권을 취득한 이후부터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 이민자로서의 경험, 역사에 대한 성찰 등을 담은 자작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의 시는 서정적이면서도 철학적인데 삶의 모순과 인간의 복잡한 감정을 담담하게 담아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때때로 리사이틀 무대에서 자작시를 낭송하기도 하는데, 연주와 낭독 사이에 흐르는 침묵은 큰 사유의 공간을 만들고 이로써 그의 예술세계는 더욱더 확장된다. 그리고 피아노는 멈추고 그의 언어가 계속 흐르게 함으로써 소리와 말, 음악과 시, 연주자와 인간이라는 이분법적 경계를 끊임없이 넘나드는데, 이로써 그는 스스로를 확장시키며, 청중과의 거리를 좁히고, 궁극적으로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그가 쓴 한 시에 보면  “진실은 악보에 있지 않다. 진실은 음과 음 사이에 있다”는 구절이 있다. 이 문장은 그의 예술 세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그는 건반을 두드리는 사람이 아니라, 건반 사이의 침묵을 사유하는 사람이다.


    2. 키신이 전하는 피아노 인문학

    (1) 예술과 시대의 경계에서 말하는 자

    예브게니 키신은 예술가로서는 조용한 삶을 살았지만, 시대의 흐름 앞에서는 침묵하지 않았는데, 2014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병합 이후, 그는 공개적으로 러시아 정부의 정책을 비판했다. 유대인으로서 차별과 편견에 맞서 싸워온 그에게, 정치적 억압과 진실의 왜곡은 결코 방관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러시아 정부의 반유대주의적 행태에 대해서 목소리를 냈고, 이로 인해 키신은 러시아 내에서 연주활동을 하기가 사실상 어려워졌다.

    하지만 그는 이에 굴복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더욱 명확한 입장과 사유를 담아 연주한것이다. 그의 연주는 정치적 선언문처럼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그 안에 확고한 태도와 철학이 녹아 있다. 그는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를 연주하면서 그 곡이 쓰인 시기의 혼란과 저항 정신을 표현했고, 쇼스타코비치의 작품에서는 당시 소비에트 체제 속에서 작곡가가 느꼈던 공포와 저항을 되살려냈다. 따라서 그의 음악을 듣는 청중은 단순히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한 시대를 체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음악은 아름다움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진실을 말하는 수단이다. 연주는 선언이며, 곡 해석은 역사에 대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예술가가 현실에 침묵할 때, 예술은 힘을 잃는다.”라고. 이런 점에서 키신은 연주자라기보다, 시대와 대화하는 인문학자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2) 건반 위의 인문학, 인간에 대해 질문을 던지다.

    예브게니 키신의 연주는 단순히 감상의 대상이 아니다. 그의 연주는 사유의 공간이며, 삶을 해석하는 또 다른 언어다. 그의 연주는 인간 존재의 복잡성과 모순, 아름다움과 상처를 동시에 품고 있다. 그래서 그의 피아노는 기교보다 무게감 있고, 감정보다 절제되어 있다. 그의 연주는 오히려 말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는 음악가이면서 동시에 구도자이고, 시인이며 철학자다. 그의 건반에는 그가 걸어온 길이 녹아 있고, 그가 마주한 세계가 새겨져 있다. 쇼팽의 섬세함 안에서도 그는 인간의 고독을 들려주고, 라흐마니노프의 격정 안에서도 그는 저항의 에너지를 끌어낸다. 우리는 그의 음악을 들으며, 묻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라는 질문을.

    예브게니 키신. 그는 음악으로 삶을 연주하고, 시를 통해 고요히 사유하며, 그 둘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스스로의 예술세계를 확장시킨다. 그의 예술은 우리에게 묻는다. 진실은 어디에 있으며 그 진실을 우리는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를. 그 질문을 향해, 그는 오늘도 조용히 건반 위에 손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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