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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화는 한국인에게 있어서 특별한 존재다. 왜냐하면 바로 그녀가 한국이 낳은 최초의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특히 한국인에게 있어서 그녀의 음악적 여정과 삶의 철학은 깊은 영감을 준다. 이제부터 그녀가 어떻게 한국의 척박한 음악환경에서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성장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어려움을 겪었고 어떻게 극복하였으며 어떠한 성취를 이뤄냈는지, 그리고 그녀가 왜 오늘날까지도 유일무이한 존재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가 후배들에게는 어떠한 교훈을 주고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정경화, 한국의 척박한 음악환경에서 세계를 향해 걸어가다
정경화는 1948년 서울에서 태어나 음악과의 인연을 일찍이 시작했다. 그녀가 음악과 인연을 맺게 된것은 그녀의 부모님 덕분이다. 그녀의 부모님은 음악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대단했다. 하나의 일화를 들자면, 6.25 한국전쟁 당시 피난길에 피아노를 이고 가느라 다른 짐들은 버리고 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그녀의 부모님이 음악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정경화는 그렇게 음악에 열성적인 부모님 밑에서 4살의 나이에 바이올린을 처음 접했다. 그녀는 곧 음악의 매력에 푹 빠졌고, 부모님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으며 음악적 재능을 키워나갔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바이올린과 피아노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하지만 그때 당시 한국에서는 바이올린을 배우는 사람이 몇 없었기 때문에 그녀가 한국에서 교류할만한 동료나 탁월한 선생님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그녀의 부모님은 그녀를 해외로 유학시키기로 결심하, 는데 이것은 정경화의 음악인생에서 굉장히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정경화는 그렇게 유럽으로 떠났고 그녀는 그곳에서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들과 함께 교류하며 음악에 대한 이해를 깊이 있게 쌓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은 후에 그녀의 음악적 색깔을 더욱 독특하고 풍성하게 만들어주었다.
독보적인 존재감으로 세계무대에서 인정받다.
그러던 중, 정경화는 1969년, 21살의 나이에 레벤트리트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단숨에 세계 음악계에 이름을 알렸다. 이 대회는 당시 유럽의 음악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대회 중 하나로, 한국인이 이 대회에서 우승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 한국은 아직 음악적으로는 국제적으로 큰 명성을 얻지 못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정경화의 이 우승은 단지 그녀 개인의 성취를 넘어서, 한국이라는 나라가 국제 음악 무대에서 인정받는 계기를 마련한 사건이었다. 즉, 서구 음악계에서 한국인 음악가의 가능성과 재능을 널리 알리는 중요한 순간이었기 때문에 한국 음악계에 큰 영향을 미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렇게 세계무대에서 인정을 받은 그녀는 이후 세계 여러 나라를 순회하며 공연을 했고, 한국을 대표하는 음악가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쌓아갔다. 이로 인해 그녀는 한국 클래식 음악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일본 음악계에서 "왜 일본은 정경화만큼의 바이올리니스트를 배출하지 못했는가?"라는 말이 나왔다고도 하는데 이는 정경화의 탁월한 실력을 인정하는 말로 전해진다. 일본의 많은 바이올리니스트들이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활발히 활동하고 있지만, 정경화와 같은 독보적인 존재는 일본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점에서 정경화가 얼마나 독보적인 존재였는지를 알 수 있다.
그녀는 이후 세계 각국에서 수많은 무대에 올라 수많은 음악 팬들의 마음을 울리는 연주를 하였는데, 각기 다른 무대와 상황 속에서도 늘 일관되게 깊이 있는 음악을 만들어냈다. 단지 뛰어난 기술로가 아니라, 각 곡마다 감동을 불어넣는 그녀만의 예술적 해석으로 그녀는 매우 특별했다.
그녀의 삶 : 삶의 어려움을 음악을 통해 극복하다.
하지만 그녀의 삶 자체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비단 그녀의 고향인 한국에서의 음악적 환경이 척박했을 뿐만 아니라, 해외 생활에서도 다양한 어려움을 겪었다. 이를테면 유학 시절, 언어 장벽과 문화적 차이를 극복해야 했는데, 독일로 해외유학을 갔었던 시절, 정경화는 독일어를 전혀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수업이나 음악용어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었는데 왜냐하면 그 당시 한국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였고, 해외 유학에 드는 비용은 매우 컸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부모님은 그녀에게 "너는 꼭 성공해야 한다" 며 그녀에게 책임감과 압박감을 느끼게 하기도 하였다. 이 외에도 그녀는 문화적 차이와 잘하는 음악계 동료들 간의 경쟁에서 오는 외로움과 압박감, 첫 번째 결혼과 재혼의 실패 등 어려가지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 무엇도 그녀의 음악에 대한 열정을 꺾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그 모든 어려움을 음악으로 풀어내며 예술가로서의 길을 꾸준히 걸어갔다. 정경화는 "음악은 나의 삶의 전부였다"라고 말했고 “음악은 나 자신을 표현하는 언어”라고 했다. 그처럼 그녀에 있어서 바이올린은 그저 현을 울려서 소리를 내는 악기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내면 깊은 세계를 담아내는 그릇으로서 사람들과 마음으로 소통하는 통로였다.
그녀가 후배들에게 전하는 이야기
그녀는 자신이 쌓아온 음악적 지혜와 경험을 후배들에게 아낌없이 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녀는 종종 젊은 연주자들에게 “음악을 통해 나 자신을 표현하라”고 하는데, 이 말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데 있어서 단순히 음악적 기량을 쌓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자신만의 고유한 스타일,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또한 그녀가 후배들에게 자주 하는 말 또 한가지는 “음악은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는 여행”이라는 말인데, 음악적으로 성장하려면 외적인 평가에 연연해서는 안되고 내적인 성찰과 자기 발전을 꾸준히 해야 한다는 말이다. 과연 끊임없이 자기의 음악적 깊이를 쌓기 위해 도전하는 정경화답다.
정경화는 예술이 가지는 힘을 믿고, 음악을 통해 삶의 깊이를 표현하는 예술가이다. 그녀가 독보적인 이유는 뛰어난 기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녀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넘어서려는 노력을 하며, 음악을 통해 내면을 성찰하고 거기에서 얻은 감동을 전달하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음악은 세대를 넘어 사람들에게 여전히 강력한 영향을 미치며, 그녀가 전하는 메시지는 음악뿐만 아니라 삶의 철학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